나는 내 사랑하는 자의 것이오(1)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가운데에 뛰어나구나..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가서, 5장 10, 16절 말씀)


  1. 학교, 강탈 당하다.

1973년 여름, 내 큰 아들 조이는 가을 입학식을 앞두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타운이라는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 살았고, 그 시절 학교 체계는 꽤나 구식이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 혹은 아이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 등을 거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는 우리 동네 학교의 선생들과 교장이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었다. 나는 내 아들의 삶에 대한 열정을 사랑했기에 하루에 여섯 시간 동안 칠판에 뺄셈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 열정을 죽이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루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와- 그녀는 웨일즈 사람으로, 이름은 이본이다 - 차 한잔 하면서, 이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큰 아들은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성적은 저조 했다. 그녀의 차남이 내 큰아들과 동갑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냐는 듯이, “우리가 학교를 세워보는 건 어때? 너가 세우고, 나는 가르치는 거야!” 그렇게 해서 창조적 배움 센터가 생기게 되었다.

학교를 개관해야할 가을 즈음, 우리는 유치원 자격을 받았다; 두 개의 교실과, 지하에는 교회, 프랑스어 선생님과 음악-체육 선생님. 그 두 분 다 기꺼이, 무료로 일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으셨다. 원생은 총 스무 명, 전부 유치원생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작은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브리스톨에 학교를 열었다. 학비는 차등제로 받았는데, 한 마디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부모들이 아이들을 마음껏 학교에 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본은 미국에 오기 전, 영국에서 학교 선생님이었고, 그녀가 사용하던 교육 방식은 탁월했다. 유치원은 점점 체계가 잡혀갔고, 학생으로써 취해야 할 중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아주 좋았다. 또한, 그 체계 속에서 아이들이 억눌린 것이 아니라, 각 아이가 가진 역량만큼 마음껏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고, 개개인에 맞춘 교육 프로그램들이 조명되었다. 아이들이 그 조그만 손으로 연필을 잘 못 쥐어도, 정말 연필을 잘 잡는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어쨌거나 학교는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1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아주 행복하게, 그리고 아주 빠르게, 배워가고 있었다.

개원 두 번째 해에 접어 들었을 쯤, 유치원생들은 초등학교 1학년으로 올라가야만 했고, 새 유치원 생들을 모집하기로 했다. 센터는 더 이상 유치원이 아닌 초등학교로 등록이 되어야 해서, 의료, 화재, 건물 규정들에 맞추어야만 했다.

“좋은 자리 발견했으면 좋겠다!!” 하고 이본이 약 올리듯이 얘기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 아이들은 여름 동안 영국의 친척들을 방문하려고 짐을 싸는 중이었다. 나 혼자 브리스톨에 남아 창조적 교육 센터를 위한 새 자리를 찾아봐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필요로 할 때, 딱 알맞은 건물이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믿음으로 정의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여정에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과 도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다. 유대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족 중심적인 유대 전통을 사랑했다. 하지만 가족과는 별개로,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나 창피스러웠다.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반이 내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학교를 왕래하는 그 길목에서 종종 “기독교인”이라고 자청하는 아이들에게 뭇매를 맞기 일쑤였고,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유대인인 나를 질타했다. 나는 매일 매일 공포에 사로 잡혀 걷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성이 난 꾸러기’들을 마주쳐야만 했다. “이 더러운 유대인아!!! 썩어빠진 예수님 살해자 같으니라고!” 나는 반에서 인기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많았던 아이였기에 내 자신을 더 당혹케 만드는 모든 것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인 내 정체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어른이 되어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조차도 내가 유대인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 나는, '종교적인 유대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고, 종교적 선택이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깊은 실망이 있었다. 나는 기독교를 히틀러와 폴란드 신부들의 행동들과 동일시 했는데 – 우리 시대 때는 –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유대인 게토에 성난 군중을 끌고 들어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응징’이랍시고 유대인 가족을 죽이려고 했다. 또한, 내 주변의 기독교인들의 위선적인 모습들도 많이 보았다. 일요일이면 어깨를 쫙 피고 콧대를 높이 들고는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 입고 교회에 가서 크게 찬송하고는, 교회 문 밖을 나서기도 전에 남들에 대해 비판하고 규탄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아버지에 대한 내 느낌은 종교가 어떠한 모습을 취하던지 간에 상관이 없었다. 그냥,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뿐. 하늘에서 깜빡이는 별들을 보거나, 그 해의 반짝이는 눈이 내리고 난 뒤에 하얗게 바뀌어버린 아름다운 세상을 보거나, 아니면, 다양한 맛과 질감, 색감, 그리고 모든 것으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시려고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진짜’ 라는 것을 알았다.(계속)


번역: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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