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성서신학적 관점에서 본 예슈아와 유대인: 성경의 메시아와 유대교의 메시아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성서신학적 관점에서 본

예슈아와 유대인: 성경의 메시아와 유대교의 메시아”

정 연 호 (University of the Holy Land)

1. 들어가며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유대인들은 왜 예슈아를 믿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후자가 좀 더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뉴앙스를 띈 질문이라는 점일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유대인은 예슈아를 안 믿죠?”이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분들은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관해 다 계시되어 있는데 구약성경(히브리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슈아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맞다. 구약성경에 메시아가 계시되어 있음에도 구약성경을 믿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인 예슈아를 믿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 맞다.[1]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예슈아를 믿기 어려운 민족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진 민족도 유대인이다. 이유는 먼저 유대교 내에 있다. 먼저 예슈아는 유대교가 갖고 있는 메시아관에 맞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예슈아를 메시아로 믿는 이방인들이 예슈아의 이름으로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핍박한 결과,[2]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자기들을 핍박한 종교의 우두머리로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3] 그래서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들’(Messianic Jews)은 유대인이 아니며 자기 동족들에게 배신자로 간주되며 메시아닉 유대인이 고국으로의 귀환도 허락되지 않는다.[4]

이쯤에서 오늘의 질문을 다시 해 보자.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 먼저 예슈아의 제자들에 의해 수집된 그 당시 유대인 군중들이 예슈아의 본질에 대해 가졌던 평가를 종합해 보면,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마 16:14)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질문의 범위를 좁혀서 “유대인들, 당신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요? 메시아요 아니요?” 예슈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당시 그를 환영하는 무리들을 붙잡고 이 질문을 물어보게 된다면,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나사렛 예슈아! 저 분은 메시아요!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요!”라고. 그러면 이 군중들이 그 예슈아를 메시아로 받아들였는가? 아니다. 도리어 예슈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다. 다시 이 질문을 오늘날의 유대인들(특히 종교인들)에게 해 보자: “당신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요? 메시아요 아니요?” (대답을 들어보나 마나) ‘(절대로) 아니요!’일 것이다.

예슈아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새파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바리새파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후 열심당파는 물론 사두개파와 에세네파가 사라지고 오직 바리새파만 살아남았고, 바리새 유대교(Pharisaic Judaism)의 랍비들이 중심이 된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되었으며, 오늘날 유대교의 모태가 된다. 따라서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의 종교인들은 바리새파의 후예들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선배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라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서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할 경우 예슈아 당시와 그 이후로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가 존재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유대교 자체 내에서 예슈아를 바라보았던 관점이 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기독교가 형성된 이후로 (바리새파의 후예로 구성된) 랍비 유대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기독교의 예슈아가 될 것이다.

2. 주후 1세기의 유대인과 메시아

  1. 왕적인 메시아: “다윗의 자손,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할 자,” “이스라엘 나라(왕국)을 회복할 자”

예슈아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당시 수 많은 유대 군중들이 예슈아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호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예슈아를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외세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왕적(Royal Messiah 혹은 정치적) 메시아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메시아’ 사상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시악’(משיח) 단어에서 출발한다. 성경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제사장과 왕이었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는 “종말에 권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종말론적인 왕으로서의 미래적 인물”을 떠올린다. 유대교의 문헌(성경과 쿰란문헌을 비롯한 제 2 성전시대의 문헌)은 주후 1세기에 다양한 메시아 형태의 메시아 기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상적인 왕, 다윗과 같은 통치자, 가지(צמח), 아론과 같은 제사장, 의의 교사, 종말론적인 예언자, 하나님의 아들, 인자(사람의 아들) 등.[5] 그 중에서 가장 대중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외세의 지배에서 이스라엘을 해방(구원)시킬 ‘다윗과 같은 이상적인 왕’으로서의 메시아였다. 예슈아가 행하던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목격하였거나 들었던 유대의 대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영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예슈아의 제자들도 예슈아의 부활과 성령을 받기전까지는 이러한 유대의 대중들과 동일한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다. 예슈아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노중에서 조차 세베대의 아내가 자기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좌.우 정승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하자 나머지 열 제자가 분노했다는 기사(마 20:20-24)와 부활한 예슈아가 승천하는 자리에서도 “이스라엘 나라[6]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묻던 예슈아의 제자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메시아 상 역시 로마를 물리치고 화려했던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해 줄 메시아였음을 알 수 있다. 예슈아의 제자들이 열심당파[7]였던 시므온을 제외하고 전부 바리새파 혹은 바리새파의 영향을 받았던 대중의 일원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들이 예슈아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시각이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 동일하였음은 당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슈아를 열렬히 환영했던 대중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폭도들로 변하게 된 배경에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사주가 있었다(마 27:20). 대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쪽을 살펴보면 이들에게는 아예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 자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성전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성전 정화)로서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였으며, 서기관[8]과 백성의 장로들 입장에서 보면 예슈아가 유대인의 진정한 ’왕적 메시아(Royal Messiah)’라면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음에 로마를 향해 칼을 들던지 해야 할텐데 자기들을 향해 비판의 화살을 겨누니 무리를 사주하여 그를 제거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던 것이다.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고 바리새파가 중심이 된 랍비 유대교가 형성된 이후에도 유대교와 일반 유대인들의 의식을 왕적 메시아 상이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를 주후 132-135년 제 2 차 유대항쟁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에 명망있던 랍비 아키바가 항쟁군 지도자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선언한 것이다.

2. 종교적 메시아

전술한 바와 같이 주후 1세기에 다양한 메시아 개념이 있었지만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왕적 메시아 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경과 쿰란문헌은 왕적 메시아와 더불어 종교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소위 두 종류의 메시아 사상(dual messianism)이 있었다.

이러한 두 종류의 메시아 사상의 기원은 직접적으로는 스가랴서에서 발견된다. 슥 6장 9-14절에 의하면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직에 오르고, 스룹바벨[9]이 왕위에 오른다. 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제 1성전 시대와 달리, 제 2성전 시대에는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자손과 기름부음 받은 아론의 자손이 각각 정치적 지도자와 종교적 지도자로서 서로 연합하여 유대 공동체를 이끌어 가리라는 이상(ideal)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10] 이러한 두 종류의 메시아 사상은 ‘다메섹 문서’(Damascus Document)[11] 와 쿰란의 ‘공동체 규율집’(Community Rule)(1QS)에서 발견된다. 이들 문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표현이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mašîach ’ahrôn veiśarēl’ משׁיח אהרון וישׁראל)란 표현이다. 여기서 아론은 제사장적 메시아를 의미하며, 이스라엘은 다윗 후손의 왕적인 메시아를 의미한다. 문제는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란 표현이 한 명의 메시아를 나타내는 것이냐, 아니면 두 명의 메시아를 나타내는 것이냐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아’란 표현이 복수로는 오직 한 번 나타나며, 한결같이 단수[12]로 나타난다는 사실[13]을 근거로 한 명의 메시아에게 두 메시아직이 통합된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지만,[14] 만일 한 명의 메시아라면, ‘이스라엘의 메시아’라고만 말해도 통합적인 칭호를 나타낼 수 있는 데, 굳이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두 명의 메시아를 의도한 것이라는 견해 역시 설득력을 얻고 있다.[15] 따라서 이 표현에서 메시아의 단.복수 문제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공동체가 어떤 형의 메시아를 더 높게 평가하고 기대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표현에서 아론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의 제사장적 사역을 우선시 했음을 보여준다.[16] 그러나 주후 1세기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을 기대했던 유대의 일반 대중은 왕적인 메시아를 더 높게 평가하고 기대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17]

그러면 역사적 예슈아가 가졌던 메시아 자의식에는 어떤 유형의 메시아가 자리잡고 있었을까? 적어도 신약성경의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유대의 일반 대중이 선호했던 왕적인 메시아 사상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역사적 예슈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세례요한이 쿰란 공동체 출신[18]이었다는 사실과 예슈아가 자신을 ‘성전’[19] 으로 비유했다는 요한의 진술(요 2:21)을 근거로, 역사적 예슈아의 메시아 자의식은 쿰란 공동체의 메시아 사상과 좀 더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추정이 옳다면, 역사적 예슈아는 자신을 종교적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이 예슈아의 자의식에 왕적 메시아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라는 말씀이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심문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는 예수아의 대답(마 27:11)을 생각할 때 역사적 예슈아에게는 왕적 메시아의 자의식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순서상으로 제사장적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선행한 후에 자신의 재림을 통해 왕적 메시아로서 다스리게 될 것임을 의식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왕적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외세의 압제하고 통치하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사 53장에서 묘사되는 고난받는 야웨의 종으로서 예슈아의 제사장적 메시아직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슈아의 제자들조차 그의 부활과 성령 강림 이후에야 제사장적 메시아로서 예슈아의 본질을 인식했다면 하물며 일반 대중들의 메시아 인식 수준은 오죽 했을 것인가.

그런데 주후 1세기의 유대인들 중에서 예슈아의 제자들 외에 예슈아를 제사장적 메시아로 받아들였던 그룹이 있었음을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행 6:7의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는 말씀에서 제사장의 무리이면 바리새파는 아니고 사두개파거나 에세네파이다. 그러나 고급 제사장들과 지주 그리고 부유한 상인들로 구성된 사두개파는 영생과 부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적이었고 핍박자였기에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제사장의 무리는 엣세네파임에 틀림없다.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의 일종임을 전제할 때 에세네파 제사장들은 쿰란 공동체와 유사한 신앙과 유사한 메시아 사상, 즉 종교적 메시아 상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성경(사 53장)에 묘사된 고난받는 야웨의 종과 예슈아를 동일시하게 됨으로써 예슈아께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의 수신자가 쿰란 공동체와 유사한 성격의 제사장들이라고 보는 이갈 야딘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20]

3. 주후 2세기 중엽 이후의 유대인과 예슈아

주후 2세기 중엽 이후로, 특히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로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동족으로부터 완전히 이단으로 배제되는 한편, 전반적인 로마의 유대인에 대한 핍박으로 인해 지극히 쇠약해지며 교회의 중심이 헬라계 이방교회로 넘어간다. 이 때부터 교회교부들의 헬라적 사고에 젖은 대체주의(supersessionism)와 그에 따른 반유대주의적 사상과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면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슈아는 유대인과 전연 관계없는 기독교, 곧 이방종교의 창시자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예슈아가 메시아가 아닌 이유들도 불어나기 시작하며 예슈아와 관련되는 성경의 메시아 본문들을 기독교의 해석과 달리 해석하는 전통들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유대교의 사람들이 기독교와 대척점에 서서 나사렛 ‘예슈’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보는 주장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는 ‘다스리는 자여야 하며 그래서 진정 메시아라면 고난받고 죽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사 53장의 고난받는 야웨의 종이 누구냐’에 대해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2) 또한 왕적 메시아로서 아무리 초자연적인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인간이며 신이 아니다; (3) 예슈가 메시아라면 그가 온 이후로도 왜 세상에 평화가 없는가? (4) 하나의 개인으로서 메시아가 두 번 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예슈는 메시아가 아니다. 예슈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1. 메시아는 통치하는 자; 고난받는 야웨의 종은 이스라엘 민족

고난받고 죽는 메시아는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라고 보는 유대인들이 있지만 이는 예슈아를 겨냥해서 비롯된 주장일 뿐이다. 실제 탈무드를 비롯한 유대 전통들에서도 두 메시야가 언급되고 있다. 하나의 메시아는 승리하고 통치하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자손(벤 다비드)이며, 다른 메시아는 고난받고 죽는 메시아인 요셉의 아들(벤 요셉 혹은 벤 에브라임)이다.[21] 탈무드에 의하면,[22] 이 메시야는 메시야 벤 다비드의 통치 이전에 있을 큰 전쟁에서 죽기 전 그의 유대 백성들을 위해 위대하고 용감한 일들을 선보일 것이다. 신약에서 예슈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인용되는 구절인 스가랴 12:10(“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은 탈무드에서 메시야 벤 요셉에게 적용된다. 유대교의 경전 탈무드에서도 고난받는 메시야가 언급되고 있다. 무엇보다 히브리 성경은 명확하게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메시야를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성경은 메시아가 그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아야 했음을 말씀하고 있다.[23] 그래서 유대교에서도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고난받는 야웨의 종으로서 예슈아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고 읽는 사 53장을 유대교의 신비종파 카발의 경전인 조하르에서도 고난받고 죽는 메시아인 요셉의 아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 메시아가 받는 고난의 성격은 매우 유사하게 묘사되고 있다: (1) 두 메시야 모두 그들의 백성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한다. 메시야 벤 에브라임(요셉)은 이스라엘에게 보여지기 전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고통을 견디고 메시야 예슈아는 대부분의 이스라엘이 그를 부인하는 그 순간에 조롱과 흉포한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형을 받는다. (2) 그들의 고통은 이사야 53장과 관련되어 설명되는데 53장은 히브리어 성경이 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 본문이다. 그런데 미드라쉬는 조하르와 같이 이 본문을 메시야 벤 에브라임에게 적용하고 있다. “고난받는 의로운 영혼들이 흩어져있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들의 주인 (Master)에 관한 지식을 쫓지 않는 죄인들에 대하여 메시야에게 말할 때 메시야는 그의 목소리를 높이고 죄인들로 인해 우실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이사야 53:5).” [24]

또 하나 주목할 주석은 랍비 모쉐 알쉐크 (Moshe Alshekh)는 슥 12:10에 관한 것으로서 메시야 벤 요셉의 죽음에 속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번째 일을 행할 것인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나를 바라볼 것이다,” 즉 완전한 회개 안에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볼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찌른 그 한 사람 바로 메시야 요셉의 아들을 볼 것이다. 우리의 돌아가신 랍비들은 메시야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속죄를 베풀기 위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이 그를 찌른 것과 같이 파악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로 인해 그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완전한 속죄가 되기 위해 그들은 회개하며 찬양받으실 그 분을 바라볼 것이다, 자기 죄로 인해 돌아가신 그 분을 위해 애도하는 자들을 용서하실 분은 그 분외에 아무도 없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나를 바라 볼 것이다”의 의미이다.”[25]

더욱 놀랍기는 이사야 52:13-53:12를 다윗의 자손 메시야의 고난에 적용한 주요 주석이 있었다는 점이다. 타르굼 요나단(Targum Jonathan)이 이 본문을 직접 “야웨의 종” 메시아에게 적용했다가 나중에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내용들을 제거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타르굼이 이것이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본질에 해당됨을 알고 본문을 메시아의 용맹과 열국에 대한 승리의 내용으로 변경하였다.[26] 끝으로 주후 8-9세기 회당의 설교편집서인 ‘페시크타 라바티’(Pesikta Rabbati) 36장에 묘사된 메시아와 그의 고난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했다: 다윗의 아들이 오는 7년의 시기에 그들은 철강막대들 (iron beams)을 가져와 그의 몸이 구부러지고 그가 울며 부르짖을 때까지 그것을 그의 목에 놓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하늘로 솟아오르고 그는 신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주인이시여! 나의 힘이 얼마나 견딜 수 있나이까? 나의 영이 얼마나? 나의 혼이 얼마나? 또 나의 다리가 얼마나? 나는 그저 인간이 아닙니까?...”

그 때에 거룩하신 이 곧 찬양 받으실 이가 그에게 말하기를, “에브라임 나의 진정한 메시야, 너는 이미 여섯 날의 천치창조 때부터 이 고난을 받기로 수긍했다. 이제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같이 될 것이다. 악한 느부갓네살이 나의 성전을 부수고 나의 성소를 태운 그 날부터 나는 나의 자녀들을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 흩었고 너의 목숨과 너의 머리의 생명으로 인해 나는 내 보좌에 앉지 않고 있다. 너가 나를 믿지 못한다면 와서 내 머리 위에 있는 이슬을 보라...”

족장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니산월에 일어나 그에게 말하기를, “에브라임 우리의 진정한 메시야여! 비록 우리가 당신의 선조이지만 당신은 우리보다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우리 자녀들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고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그런 잔인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세상 나라들에게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어둠과 암흑 속에 앉아 당신의 눈은 빛을 보지 못하며 당신의 피부는 뼈에 붙었고 당신의 몸은 나무처럼 말라버렸습니다. 당신의 눈은 금식 때문에 어두워졌고 당신의 힘도 질그릇 조각처럼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 자녀들의 죄 때문입니다…”[27]

어떤 학자들은 이 장에서 메시야가 에브라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 자료는 요셉의 자손 메시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데 비해, 다른 학자들은 그가 “나의 의로운 메시야”(하마쉬히 하짜딕 המשיחי הצדיק)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비록 에브라임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다윗의 자손 메시야 벤 다비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랍비 쇼세트 (Schochet)는 “에브라임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집합적 이스라엘과 연결될 수 있지만 메시야 벤 다비드를 가리킨다” 라고 말했다.[28] 여하간에 중요한 것은 전통 유대인들에게 귀하게 여겨지는 랍비문학에서 고난받는 메시아에 관해서 상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몇몇 유대 지도자들이 그들의 전승 문학에서 기독교인들이 히브리어 성경 자체가 고난받는 메시아, 즉 메시야의 고통과 죽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메시야의 고통에 관한 내용들을 삭제했을 수도 있지만, 이상에서 보듯이 탈무드, 카발라, 미드라쉬에서 이러한 메시아의 고난을 다루는 본문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2. 메시아는 사람이다

메시아의 신성에 관한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이다. 유대 전통은 메시아의 초자연적 권능을 인정함에도 완전한 신성을 부인한다. 메시아의 신성을 인정할 경우 유일신 사상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에녹서와 같은 위경들이 정경으로 편입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등장하는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유대교의 입장은 메시아의 인성만을 인정한다. 유대인 학자 조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는 이 점을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유대의 메시아는 모든 유한한 존재와 같이 살과 피를 가진 본질적으로 정녕 인간이다. 거룩과 의와 진리의 면에서 그리고 힘과 권위와 관련해서 메시아는 ‘최상의 인간’(supreme man)이다…그러나 그의 뛰어난 속성과 함께 메시아는 인간으로 남는다.”[29] 또한 “탈무드 어디에도 메시아를 초인적 구원자(super-human Deliverer)로 믿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30]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유대 전승들이 메시야의 특정한 초자연적 특성들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보라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는 사 52:13을 미드라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 가슴 속으로 그것을 들어올리라” (민 11:12) 라고 명함받은 모세보다 더 위에 들어 높임 받으셨다; “[그 바퀴의]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겔 1:18) 라고 묘사된 섬기는 천사들보다 더 높으시다. 그는 누구로부터 나올 것인가? 다윗으로부터이다” (Yalqut Shim’oni 2:571).[31]

유대의 자료 미드라쉬는 이사야 52:13을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출중함을 메시야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사야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높임’에 관한 표현들-‘세우다,’ ‘들어 올려지다,’ ‘높이 찬양받다’-이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있다. 14세기의 랍비 모세 이반 크리스핀(Moshe Ibn Crispin) 도 메시야가 천사들보다 더 높임 받는 것에 서술하고 있다:

“[그는] 섬기는 천사들보다 대단히 위에 있음은, 같은 포괄적인 지능으로 천사들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엄청 높은 특권인데, 복합적이며 물질적 속성으로서 이러한 등급의 지능에 도달한다는 것은 영적인 것에 속하여 있는 것들보다 더욱 신성함에 가까운 것이다; 그럼으로 그에 대해 이리 말하고 있다, “그의 힘은 섬기는 천사들의 힘보다 더욱 크다,” 왜냐하면 이들(천사들)은 그들의 지능을 사용할 때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데, 복합적 [속성을 가진 자]는 그의 속성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적 요소로 인해 계속적으로 방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능의 등급을 생각했을 때, 그는 “매우 높다” 라고 하고 있으며, 그의 힘은 “천사들보다 더 크다” 라고 할 수 있다.

… 그리고 이 “여호와의 종”이 태어나, 그가 판단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는 그 날부터 그는 계속해서 지능의 소유로 인해 현저히 드러날 것이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두에게 불가능한 것을 받을 것인데 이는 자신 외에 어떤 인자들 (sons of men)도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기까지 계속 될 것이다.”[32]

이러한 서술들을 메시야의 선재(pre-existence)나 그가 하늘의 구름 속에서 오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른 전통들과 결합해보면, 유대 전통들도 높임 받고, 초인적이며 반-신성적 속성의 메시아를 사실상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33] 에스라 4서에서 보듯이 다니엘의 “인자와 같은 이” (one like a son of man)를 완전히 천상적 인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지상을 움직이는 메시아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니엘의 인자 묘사는 다윗 메시아(Davidic Messiah)에 적용되어 다른 문서들보다 더 명확하게 천상의, 초인적 성격의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34]

이 모든 랍비적 성서해석 자료들을 모을 때, 천상의 구름 속에서 오실 높임 받는 이 인물은 다름 아닌 다윗적 왕(Davidic king), 하나님의 아들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니엘서 7:13-14의 구절들을 다시 한 번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특히 탈무드와 주요 중세시대 주석가들이 이 구절들이 메시아를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35]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 7:13-14)

이 구절들이 메시야의 신성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물론 학문적인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하늘의 구름 속에서 오시며 온 세계적으로 높임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가 단지 인간만은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진다.[36]

그리고 무엇 보다도 성경 자체는 메시아의 신성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성경해석학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유일성(unity)과 충돌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 9:6은 명백히 동정녀의 몸에서 나는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엘 기뽀르 (אל גבור 으로 불릴 것이라는 표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본질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신성은 성서해석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신 6:4의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우리말 성경 “오직 유일한 여호와”라는 표현에 대한 히브리어 “야웨(여호와) 에하드”(יהוה אחד)는 문자적으로 ‘여호와는 하나이다’로 번역된다. 여기서 ‘하나’는 서수(cardinal number)인데, 고유명사인 ‘야웨는 하나, 둘, 셀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하나이다’는 표현은 여호와가 하나 이상일 때 가능한 표현이다. 학자들은 ‘하나’(에하드 אחד)를 서수가 아닌 다른 의미로 해석을 시도했지만[37]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주전 9-8세기의 것으로 돌려지는 쿤틸레드 아즈루드(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사마리아의 야웨’, ‘테만의 야웨’ 등의 표현에서 보여지는 ‘야웨의 복수 현현’(multi manifestations)에 대한 부인(negation)으로 나온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38] 창 2:2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에서 ‘한 몸”(바싸르 에하드 בשר אחד)의 ‘하나’(에하드 אחד)는 절대적 단일(absolute unity)을 의미하지 않는 단일(unity)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복합적 단일의 예를 창 1:26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26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짤메누 צלמנו)을 따라 만들자’고 자신을 복수로 표현하신 하나님이 27절 이후에서 다시 단수로 표현되는 것은 복합적 단일의 좋은 예이다. 사 6:6에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복합적 단일을 엿볼 수 있다.[39]

3. 예슈가 메시아라면 왜 세상에 평화가 오지 않았나

유대인들은 예슈가 메시아라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왔어야 했다고 말한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로 이 이유를 들어 예슈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자라는 전제는 올바른 것인가라는 점이다. 메시야가 ‘평화의 왕’이라고 말하는 것과 메시아의 목적이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성경 어디에서도 “메시야가 오실 때[40] 이 땅에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41] 그 대신 말세에 다윗보다 더 위대한 다윗의 자손의 통치[42]와 함께 올 평화의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43] 그러나 유대 전승은 다윗과 같은 메시아가 다윗과 같이 제사장 및 왕 같을 뿐만 아니라 다른 중요한 성경적 예언에서 언급되었듯이 고난을 받고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메시아는 먼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드시고 세상을 향한 화해와 용서에 대한 소망을 가져오셨다. 그의 초림의 궁극적인 영향이 그의 재림과 이 땅에서의 완전한 평화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다.

18-19세기의 유명한 랍비 빌나 가온(Vilna Gaon)은 탈무드의 해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탈무드는 말하기를: “세상은6000년 동안 존재할 것이다. 2000년의 황량한 시대와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2000년의 토라 시대 (아브라함부터 서력기원 초기까지); 그리고 2000년 동안의 메시아닉 시대 (대략 2000년이 걸림); 그러나 우리의 죄가 많아서 이 모든 것을 잃었다” (즉, 메시야는 예측된 시간에 오지 않으셨다).[44] 잘 알려진 이 유대 전승에 따르면 메시야는 약 2000여년 전에 오셨어야 했다는 것이다! 라시(Rashi)가 설명했듯이, “2000년의 토라시대 이후에 메시야가 오시고 악한 왕국들은 끝나며 이스라엘을 정복했던 것의 무너짐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대신에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많아서 “메시야는 여태껏 오시지 않았다”—이제는 2000년 이후에 오신다는 것이다.[45]

그러나 라시의 설명과 달리 메시야가 2000년전에 오셨지만, “우리의 죄가 많으므로” 그분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메시아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의 죄 문제가 완전 해결되면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시간과 특성에 대해 탈무드 전승을 살펴보자. 탈무드는 기록하기를,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격이 있다면 (worthy) 메시야는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다니엘 7:13); 만약 그들이 자격이 없다면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실 것이다 (스가랴 9:9)[46] 탈무드에 의하면 예슈아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맞을 자격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메시아가 오셨을 때 백성들이 그를 맞이할 자격(깨끗한 상태)이 없었기에 평화의 시대를 맞을 수가 없었음을 의미한다.[47] 그러나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메시야로 알아볼 때[48] 그가 하늘구름을 타고 돌아오실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화의 시대(사 2:1-4; 11장)는 그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4. 메시아는 두 번 오지 않는다

유대교는 메시아의 오심에 관해 다양한 전승을 보여주고 있는데,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두 메시아 상과 잠재적 메시아 상이다. 예슈아 당시에 있었던 두 메시아 사상(dual messianism), 즉 제사장적 메시아와 왕적 메시아 상이 있었고, 그 이후의 전승에서는 고난의 메시아로서 요셉의 자손 메시아가 먼저 오고, 뒤를 이어 승리와 통치의 메시아로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모든 시대에 잠재적 메시아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슈아는 제사장적 왕(Priestly King)으로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제사장적 메시아로서 “나귀를 타고 오셔서” 사명을 완수하시고, 전술한 바와 같이 백성들이 그를 받을 만한 자격이 될 때 평화의 시대를 여는 승리의 왕으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이 성경은 물론 유대 전승에 비추어 보아도 확실하지 아니한가.

4. 나가며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누구인가? 예슈아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오실 메시아 ‘다윗의 자손’의 표상을 당시 자기들의 목을 죄고 있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분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 그림에 맞지 않았던 예슈아는 십자가에 달렸지만 히브리서에서 그를 영접했던 에세네파 제사장들에게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슈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적 왕”(Priestly King)이란 사실이 전달되었다.

바울은 “제사장적 왕”으로 오신 예슈아를 알아 보지 못한 자기 동족이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비결이 이방인들이 그들을 “시기나게” 함에 있다고 설파하였다(롬 11:11-14). 그러나 2세기 이후로 바울의 전도로 성장한 헬라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권고를 망각해 버리고, 언약과 율법과 복음의 해석에 있어서 헬라적 사고에 바탕한 대체주의를 지향함으로써 복음의 유대적 뿌리를 제거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이분법적, 대립적 사고에 입각한 이방교회 지도자들의 대체주의와 그에 따른 반유대주의가 유대인과 회당을 사탄과 사탄의 회당으로 규정하게 되며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끝내는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이끌어 갔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슈아’는 ‘예슈’이며 자기들을 핍박한 종교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신 예슈를 믿는 것은 하나님 한 분외에 또 다른 신을 믿는 우상숭배이며, 그는 나약하게 십자가에 죽어간 인간이었을 뿐이며, 말만 “평화의 왕”이지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 거짓 메시아였으며, 다시 온다는 것도 일종의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들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 예슈아가 이런 모습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비춰지게 된 데는 모두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책임이 예슈아를 믿는 우리의 선배들과 우리에게 있다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부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헬라적 사고의 아들이었던 종교개혁자들의 사고에서 나온 일부 교리들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성경에 비추어 재고되어야 할 점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헬라적 사고에 바탕한 뿌리깊은 대체주의와 대체신학이 유대인들에게 ‘예슈아’의 존귀한 이름이 ‘예슈’란 저주의 이름으로 전락되게 한 출발이다. 아직도 우리의 신학적 정신을 덮고 있는 대체주의적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진정 성경과 믿음과 은혜의 길을 되찾는 문이며 유대인들에게 ‘예슈’로 전락된 ‘예슈아’를 바로 알리고 그 존위를 되찾게 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1] 2015년 현재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수는 약 1600 만명이며, 그 중에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 소위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 숫자는 약 310,000 정도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내에는 637만의 유대인 중에서 15,000~20,000 정도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있으며 약 250 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예슈아를 믿는 유대인 신자의 비율은 1.9%이며, 이스라엘 내에서는 0.3% 정도의 유대인들이 예슈아를 믿고 있다.

[2] 기독교의 속사도 시대 이래로 대체주의와 그에 따른 반유대주의로 인해 기독교의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핍박에 대해서는 크리스찬 투데이의 정연호 칼럼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고하라.

[3] 유대교의 랍비들은 기독교의 ‘예슈아’를 구원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예슈아’라고 호칭하지 않고 ‘예슈’(ישו)라고 부르며 히브리어 ‘유드’(י), ‘쉰’(ש), ‘바브’(ו)를 가지고 예슈에 대한 언어유희적 저주를 한다: ‘이마크 슈모 베지크로’(ימח שמו וזכרו)-그의 이름과 기억이 지워져 버릴 것이다.

[4] 1950년 7월 5일에 통과된 귀환법에 따르면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자로서 (유대교 외의) “다른 종교”를 믿지 않는 자가 유대인이다. 전세계에서 이 규정에 합당한 자이면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1970년 수정 귀환법에서는 유대 할라카에 따른 모계 유대인은 물론, 부계 유대인, 조부모 중 한 편이 유대인이거나 유대인과 결혼한 배우자, 그리고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에게로 그 대상이 크게 확대된다. 그런데,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가 ‘예슈아’를 메시아로 영접한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전술한 귀환법에 근거하여 대법원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기독교로 개종한 자를 귀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1989년 12월 25일은 개종한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유대 공동체의 인식을 대법원이 확정한 날이다. 성탄일에 게리와 쉬를리 베레스포드(Gary and Shirley Beresford) 부부의 귀환 신청은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거부되었다. 대법원은 귀환법(Law of Return)에 근거하여 예슈아를 믿는 이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자로서 유대인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이스라엘 시민권을 얻을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판사 메나헴 엘론(Menahem Elon)은 그의 판시 중에서 ‘메시아닉 유대인’ (Messianic Jew)들이 관습적으로 유대 민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다: “과거 2천 년의 역사에서…유대인은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유대 민족에 속하지 않으며…유대인임을 주장할 권리가 없음을 결정하였다” (Jerusalem Post Jan. 8, 1990 기사 인용). 나사렛 예슈아를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Messianic Jew)은 스스로를 비-유대인(non-Jew)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5] 주후 1세기의 유대인들의 다양한 메시아 기대(Messsianic expectations)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J. Neusner, W. S. Green and E. Frerichs, Judaisms and Their Messiahs at the time of the Christian Era (Cambridge: Cambridge, 1987); J. H. Charlesworth (ed.), The Messiah; Developments in Earliest Judaism and Christianit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2) ; J. J. Collins, The Scepter and the Star: The Messiahs of the Dead Sea Scrolls and other ancient literature (New York: Doubleday, 1995); C. A. Evans and P. W. Flint (eds.), Eschatology, Messianism and the Dead Sea Scrolls (Grand Rapids: Eerdmans, 1997).. Walter C. Kaiser, The Messiah in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5), appendix 2, 240-42,에 의하면, 승리의 왕, 제2의 다윗, 주님의 가지(쩨막), 신실한/대 제사장, 교사, 예언자, 인자 등으로 묘사.

[6] 나라에 대한 헬라어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는 왕국이다.

[7] 열심당파는 바리새파의 수정노선이다. 열심당파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을 위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바리새파와 달리 인간의 무력적인 방법에 의해 성취해야 함을 내세웠고 결국 주후 66년 제 1 차 유대항쟁의 주역이 된다.

[8] 서기관은 신약성경에서 율법사, 교법사라는 표현으로 나오는 바리새파의 지도자이다.

[9] 슥 6:12에서 ‘순’(‘쩨마크’ צמח)이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이는 ‘다윗의 자손’에 대한 별칭인 ‘다윗의 순’(‘쩨마크 다윗’ דוד צמח)을 가리키는 것이며, 직접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나타낸다.

[10] 이에 관하여 S. Talmon, "The Concepts of Masiah and Messianism in Early Judaism," The Messiah: Developments in Early Judaism and Christianity (ed. J. H. Charlesworth; Minneapolis: Fortress, 1992), 106-107쪽 참조.

[11] ‘다메섹 문서’(Damascus Documents)는 중세 카이로 게니자(Cairo Genizah)에서 발견되었으며, 쿰란에서 발견된 단편들(fragments)은 이 사본의 고대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 ‘다메섹 문서’를 낳은 공동체가 곧 쿰란 공동체였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009년 8월 2-6일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15차 세계유대학술대회 (World Congress of Jewish Studies)의 발표자, 에이알 레게브 (Eyal Regev) 박사는 “쿰란 (문서)에 몇 개의 종파가 있었나?” (How Many Sects Were in [the scrolls of] Qumran?)라는 제목의 논문 발표에서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파, 그리고 다메섹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결론을 내렸다 : ‘세속과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경건파인 ‘야카드’(יחד)공동체가 있었고, 이 ‘야카드’ 공동체에서 크게 세 줄기의 경건과 은둔 공동체들이 형성되어 나갔다; 세 줄기의 공동체는 ‘다메섹 계약 공동체’, ‘에세네파’, 그리고 ‘쿰란 공동체’이다.‘ 그러나 세 공동체는 하나의 줄기에서 나왔기에 사상적으로 유사하였다고 본다.

[12] CD 12.22-23; CD 13.20-22; CD 19.34-20.1; CD 14.18-19; CD 19.9-11. CD 12.22-23에서는 ‘마슈악’(משׁוח)이란 표현으로 나타난다.

[13] ‘다메섹 문서’(CD 12.22-23; CD 13:20-22; CD 19:34-20.1; CD 14:18-19; CD 19:9-11)에는 전부 단수로 나타나며, 오직 ‘공동체 규율집’(1QS 9:10-11)에서만 한 번 메시아가 복수로 나타난다: “Mashichei Aaron veIsrael”משׁיחי אהרון ישׁראל), 즉 “messiahs of Aaron and Israel." 이 예외적인 현상에 대해 Wise와 Tabor는 ‘공동체 규율집’의 현재 사본이 이전의 것을 개정한 것이며, 현 사본보다 고대의 것인 4Q259에는 ‘메시아’를 복수로 언급하고 있는 구절(line)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후대의 삽입으로 보고 있다: M. O. Wise and J. D. Tabor, "The Messiah at Qumran,"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8,6 (1992), 60.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견해에 관해서는 M. G. Abegg, "The Messiah at Qumran,"M. G. Abegg, "The Messiah at Qumran: Are We Still Seeing Double?," Dead Sea Discoveries 2, 2 (1995), 131쪽을 보라.

[14] Wise and Tabor, "The Messiah at Qumran,"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8,6 (1992), 60-65쪽.

[15] J. VanderKam, "Messianism in the Scrolls," The Community of the Renewed Covenant (eds. E. Ulrich and J. VanderKam;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4), 211-234쪽. 쿰란 공동체가 두 명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또 다른 주장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S. Talmon, "The Concepts of Masiah and Messianism in Early Judaism,"79-115쪽.

[16] 쿰란의 메시아 시대 축제에서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항상 제사장이 식탁의 상석을 차지하고, 그가 축복하고 먹기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도 빵과 포도주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도 제사장적 메시아를 선호했음을 보여 준다: 1QS 6.8-9; CD 10.4-6; 1QSa 2.17-22 등 참조.

[17] 이런 왕적인 메시아 사상은 주전 1세기의 것으로 돌려지는 ‘솔로몬 시편’(Psalms of Solomon)에서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이 나타나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정화하고 어떤 이방인도 더 이상 이스라엘에 살지 못하게 한다는 구절(17:28)에 잘 나타나 있다.

[18] 세례요한의 쿰란 공동체 관련성은 그가 비록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연로했던 부모의 사망후 아마도 어린 나이에 에세네파의 가문에 입양되어 갔을 가능성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War of the Jews, 2.8.2 §120)에 따르면, 에세네파 사람들은 “아직 유순하고 순종적일 때, 다른 사람의 아이들을 취해서(입양하여)...그들을 자기들의 방식에 따라 양육”했다. 또한 복음서-막 1:3; 마 3:3; 눅 3:3-6; 요 1:2-3-는 한결같이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여 요한의 광야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데, 쿰란의 규율집 (1QS 8:12-16) 또한 쿰란 공동체가 왜 광야에 있어야 하는 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아이가...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는 구절에서 ‘빈 들’은 쿰란 공동체가 있는 유대광야를 암시하고 있다. 세례요한과 쿰란 공동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D. Schwartz, “On Quirinius, John the Baptist, the Benedictus, Melchized다, Qumran and Ephesus,” Revue de Qumran 13 (1988), 635-646쪽; J. H. Charlesworth, “John the Baptist and Qumran Barriers in Light of the Rule of the Community,” The Provo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Dead Sea Scrolls (ed. D. W. Parry and E. Ulrich; Leiden: Brill, 1999), 353-375쪽.

[19] 예루살렘을 떠나서 별도의 성전이 없었던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을 ‘사람 성전’ (‘미크다쉬 아담’ מקדשׁ אדם)으로 간주하였다. 일명 4Q Florlegium 으로 불리는 4Q 174에 나오는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해 ‘종말론적 성전,’ ‘사람으로 이루어진 성전,’ ‘영적인 성전’ 등 해석상의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쿰란 사람들이 자신들을 ‘성전’으로 간주한 표현으로 해석하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크다쉬 아담’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D. Dimant, "4QFlorilegium and the Idea of the Community as Temple," in Hellenica et Judaica (ed. A. Caquot et al.; Editions Peeters: Leuven, 1986), 165-89쪽; G. J. Brooke, "Miqdash Adam, Eden and the Qumran Community," in Gemeinde ohne Tempel (Tübingen: Mohr Siebeck, 1999), 285-301쪽; L. H. Schiffman, "Community Without Temple: The Qumran Community's Withdrawal from Jerusalem Temple," in Gemeinde ohne Tempel (Tübingen: Mohr Siebeck, 1999), 267-84쪽.

[20] Yigal Yadin, “The Dead Sea Scrolls and the Epistle to the Hebrews,” Scripta Hierosolymitana 4 (Jerusalem, 1958), 36-55.

[21] Michael L. Brown, Answering Jewish Objections to Jesus v.2 (Grand Rapids: Baker Books, 2000), 220.

[22] 바벨론 탈무드 쑤카 52a.

[23] Michael L. Brown, Ibid., 221

[24] 조하르 2:212a (Patai, Messiah Texts, 116 번역).

[25] David Baron, The Visions and Prophecies of Zechariah (Grand Rapids: Kregel, 1972), 442 재인용.

[26]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Samson H. Levey, The Messiah: An Aramic Interpretation: The Messianic Exegesis of the Targum (Cincinnati: Hebrew Union College-Jewish Institute of Religion, 1974), 63-67 참조.

[27] Patai, Messiah Texts, 113-14.

[28] Schochet, Mashiach, 92-93, n.2.

[29] Joseph Klausner, The Messianic Idea in Israel, tr. W. F. Strinespring (London: George Allen and Unwin, 1956), 520, 523.

[30] A. Cohen, Everyman’s Talmud (New York; Schocken Books, 1975), 347. 메시아의 인성에 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할 것: Gershom Scholem, The Messianic Idea in Judaism and Other Essays on Jewish Spirituality (New York: Schocken, 1971), 1-77; Moshe Idel, Messianic Mystics (New Haven; Yale, 1998); James H. Charlesworth (ed.), The Messiah (Minneapolis: Fortress, 1992).

[31] Neubauer and Driver, Fifty Third Chapter of Isaiah, 2:9 에서 번역.

[32] Ibid., 2:102-3.

[33] Michael L. Brown, Answering Jewish Objections to Jesus. vol. 2, 216.

[34] Collins, The Scepter and the Stars, 189.

[35] 예슈아께서 자신의 재림과 관련된 메시아적 사명을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라는 단 7:13의 표현과 연결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36] 다니엘의 “인자(Son of Man)”가 매우 높이 고양되어서 일부 주석가들은 그가 천사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구절이 비-메시아적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 중 가장 흔한 것은 ‘인자’가 집합적인 이스라엘 내지 이스라엘 내의 의인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박은 다음을 참고할 것: John E. Goldingay, Daniel,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89), 167-72; John J. Collins, Daniel, Hermenia (Minneapolis, Fortress, 1993), 304-10. 초기 유대 주석가들은 다니엘의 ‘인자’를 메시아로 인정했다 (Collins, Daniel, 306-7, n. 63).

[37] 고르돈(C. H. Gordon)은 ‘하나’를 고유명사로, 메이스(J. Mayes)는 ‘유일한’ 뜻의 형용사로 해석을 시도했지만 설득력이 없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각주 38을 참고하라.

[38]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할 것: Youn Ho Chung, The Sin of Calf: The Rise of the Bible's Negative Attitude Toward The Golden Calf (New York/London: T & T Clark, 2010), 197-99

[39]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합적 단일(composite unity) 혹은 삼위일체(tri-unity)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랍비 요엘의 책을 참고하라: Yoel Natan, The Jewish Unity (Chula Vista: Aventine Press, 2003).

[40] 오시는 것과 오셔서 통치하는 것은 다르다.

[41] Michael L. Brown, Answering Jewish Objections to Jesus. vol. 1, 70.

[42] 사 11장 참고.

[43] 사 2:1-4 참고.

[44] 바벨론 탈무드, 산헤드린 97a-b

[45] Michael L. Brown, Ibid..

[46] 바벨론 탈무드, 산헤드린 98a.

[47] 바벨론 탈무드, 요마 39b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속죄일에 올려진 제물들을 2차 성전이 파괴되기 40년전부터 받지 않으셨다. 이는 수차례 특별한 징표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는데 40년동안 징표들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성전은 서기 70년에 파괴되었으므로 서기 30년부터 서기 70년까지40년의 기간 동안 매년 올려지는 제사들이 받아들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기30년에 어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거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속죄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가 메시야께서 스스로를 완전한 마지막 제물로 바치셨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8] 예수아께서 다시 오실 때 유대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3:39)하며 그를 환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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