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시의 러브스토리

나와 나의 파트너 존의 이야기는 삼 년반 전 나의 삼촌이 관여했던 싸리 전시회의 오프닝에서 시작되었다.

존은 자원봉사자로 소속 되어 있던 이스라엘 단체의 쬬피랑 같이 그 전시회에 왔었다. 쬬피는 존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후에는 그에게 엄마와 같은 분이 되었다.

나중에 쬬피는내 인생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나는 삼촌과 같이 전시회에 왔고 존은 쬬피랑 같이 왔는데 삼촌과 쬬피는 알고 지낸 지 20년이나 되는 관계였다.

전시회가 끝날 때 나는 창문 밖으로 존과 쬬피를 보면서 삼촌한테 이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쬬피 옆에 서 있던 멋있는 한국 남자가 내 마음을 확 사로잡았다.

솔직히 나는 전에는 아시아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밖에 나가더라도 유럽 혈통의 이스라엘 친구들과 나갔고 한국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존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삼촌은 나에게 존은 이스라엘에 와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젊은 청년이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삼촌에게 존이 참 잘생겼다고 얘기하니 내 이상형을 알고 있는 삼촌은 정말이냐고 물어 보았다.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삼촌은 흥미로워 하셨다. 전시회를 마치고 우리 모두는 카페로 갔다. 쬬피는 내 옆자리에 존이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우리는 앉아서 히브리어로 조금 얘기하다가 영어로 대화를 하였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 버스 안에서 우리는 쬬피와 삼촌의 바램처럼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고 그 순간부터 우리의 긴사랑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입원 중인 할머니를 방문했고 존은 할머니 곁에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할머니를 방문하는 동안 우리는 틈틈이 예루살렘 구경을 다니며 맛나는 것도 사먹었다. 예루살렘에서 존이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장애인센터에도 갔었다. 네 번째쯤 만났을 때 우리는 서로가 함께 할 운명이라는것을 알았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고 함께 할 운명이라는걸 깨닫는 그 순간부터 그 무엇도 우리의 사랑을 끊을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를 엄마한테 얘기했을 때 힘든 단계가 시작되었다. 우리 관계에 대해 주위 사람들도 좋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제일 심각하게 반응한 분은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엄마와 존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까지 하였다. 엄마는 내가 유대인이 아닌 사람과 데이트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는데 존은 전혀 유대인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반응은 나를 난처한 상황에 몰아넣었다.


그때 존은 그가 오래 전부터 가고 싶어했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그는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오면 어떤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다. 2주 후 존은 이스라엘에 돌아왔고 나의 부모님 집에 머물렀는데 엄마는 그가 유럽에 갔을 때 우리가 헤어진 줄로 알고 그를 그냥 손님처럼 대했다.

존은 이스라엘에서의 기약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하던 건축학 공부를 마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와 존이 계속 연애하고 있는 사실과 내가 그와 같이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 엄마는 몹시 화를 냈다. 나는 집을 떠나며 언젠가는 엄마도 존을 좋아할 것이고 그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누가 뭐라해도 나는 엄마의 딸이기 때문이다.


존이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한국에 갔을 때 그가 몹시 그리웠다. 나는 5개월 만에 휴학을 하고 한국에 갔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땐 겨울이었는데 가자마자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이전에 이런 나라가 존재했는지도 몰랐다. 한국 전통, 음식, 사람, 존의 가족을 통해서 모든 것이 문화충격으로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을 볼 수 있어서 참 기뻤다.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한달반을 한국에서 머물렀다. 한국을 떠날 때 공항에서 다음 몇 개월간 존을 볼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사람이 내 남은 인생을 함께 할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나는 존을 포기할 수 없고 그와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개월 후 이번엔 여름에 한국에 가게 되었다. 처음과 같은 문화충격을 겪지 않고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갔다. 이번에는 많은 재미를 느꼈고 편하게 지낼수 있었다. 나는 존과 그의 가족,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여름이 지나고 9월 이스라엘에 돌아와 복학을 하였다. 그리고 존은 이스라엘에서 일하며 살기 위해 이스라엘에 왔다. 이때쯤 엄마는 내가 존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많이 힘들어 했다. 결국 긴 씨름을 한 끝에 엄마는 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후 우리는 부모님과 6개월간 함께 산 후 텔아비브 근처 라마트 간이라는 도시로 이사했다.

존은 히브리어를 좀 할수 있었지만 처음 이곳에 적응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LG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다음해 2015년에 부모님과 함께 상견례를 위해 한국으로 갔다. 한국을 가기 위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같은 기본 한국어도 가르쳐 드렸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내가 처음 느꼈던 문화충격을 겪지 않게 하려고 애썻다. 한국에서의 상견례는 모든 면에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후 우리는 한국 전 지역을 여행했고 10월에 결혼식도 했다. 우리 가족은 전통적인 한국 결혼식을 겪으며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모든 것은 특별했다. 전에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을 하려고 생각도 했었으나 한국 전통결혼식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현재 우리는 이스라엘에 살고 있고 우리 가족은 존을 사랑하고 존도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이스라엘에서의 삶은 쉽지 않지만 잘 헤쳐나가고 있다. 나와 존은 가끔 종교에 관해 논쟁하지만 항상 합의점을 찾아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리고 엄마는 매일 저녁 존과 함께 앉아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나는 우리의 관계를 통해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았다. 우리가 미래를 계획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을 내려다보며 우리를 보고 웃고 계신 것을 안다. 내 삶의 가장 큰 사랑은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왔고 이 선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다.



I had an idea of volunteering abroad for a year when I was a university student. Having only a semester left for my graduation, I suspended it. Several places popped in my mind for the volunteering, but I decided to go to Israel – which is a relatively unique place for a visit and which is a place that made me wonder; how God thinks about His land while reading the bible.

During a-year-volunteer, I made many friends, adapted to their culture having traditional holidays, events with locals and learned more about Israel. (In those days, it was just a simple culture-experience following the texts of the bible, but it became a critical foundation for me to live in Israel)

Once, I was invited to an exhibition, for which my acquaintance’s friend was coordinating. That was the time when I met my wife, “Shosi”, who changed my life.

There were no worries for us during my stay in Israel, but I got anxious when the time came for me to go back to Korea. It was the moment to consider not only the long-distance relationship, but also a semester left in the university, my carrier, the place to live in and whether she was my destined mate. I have started working after my graduation in Seoul; however, I was struggling enormously hard for making a lifetime decision to choose between Shosi – who was rushing me to come back to Israel – and my parents – who have never imagined that their son would live far away from them.

I agonized, asking God what his intentions are, more than a thousand times. Shosi is the one who terminated this agony. She has made two big visits to my hometown during my a-year-stay in Korea. As pushing me to come over to Israel, she has impressed my parents, my friends and everyone I know. (Half of her intention of visit –longing for me, another half - curiosity about her future husband’s nation and people).

I had to quit my job even though I have just started to work – because Shosi had made her final notice. No choice. I went back to Israel with everything left behind. When I was a volunteer, who had a ‘due date’ to return to Korea, Israel was such a loving country where God looks after. However, it became an ordeal in which we needed to take our steps only depending on the belief to our Father. (There were a lot of obstacles – 3 months to find a job which drove me crazy, bone-shaking visa procedure: I had to choose among 3 options – working holiday, volunteering, and marriage. I chose ‘marriage visa’, which would render me able to work and live in Israel in long term.) Neither am I a Jew, nor an American, nor a German - who are more familiar to Israelis: it was never easy being a “Korean” to make her parents to know about ‘me’, to make them understand, and to see how the wind blows every day to obtain their permission.

By God’s grace, I finally got a job. That’s when Shosi’s family started to open their mind, observing how I am stabilizing situations in Israel. We registered our marriage, moved our home close to my work and started to have a real “Israeli” life. (In this manner, I had to approach differently from the ways which worked in Korea). Our emotional and financial circumstances have had improved through several months, which eventually led to our marriage – which was postponed for many days - and to the unification of both families to travel altogether. I believe, there wouldn’t be a more overwhelming moment than that in my life.

Israel walked gradually into my heart without notice; yet, it was still above my imagination that I would move over and start to live in the country. Israel became a reality with many high hurdles to face when I started to love Shosi, although I made up my mind and got ready for this; at least I thought so. Religious and Cultural difference were an ambush.

My heart shrunk whenever my parents and/or my wife’s parents boycotted calling each other ‘aliens’, especially when my parents being so stubborn about the place for wedding. However, despite the dissension over wedding ceremony, Shosi’s family were all satisfied by it, in particular, the traditional Korean wedding ceremony was the one made two families in one accord in the end.

Upon my arrival to Israel after the wedding in Korea, the reality began and it was never easy for me, who speaks slack English and Hebrew; to work in a Korean company where there isn’t any Korean, being knocked down here and there while coordinating between Israeli and Korean, who have totally different ways of thinking.

Opening a bank account, paying taxes, learning social systems…NONE of them were easy. Yet, I could solve all those problems without a mistake thanks to the consults from my Jewish acquaintances who got along during my volunteering, and other Korean-Jewish couples, who went through similar situation: who my Father has appointed them as my ‘friends’. Above all, His Grace was my motive, and my power to survive in Israel.

#유대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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