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한 개 집어 먹은 죄

김삼성의 선교칼럼 - 토마토 한 개 집어 먹은 죄


신대원 2학년이 끝나 갈 무렵인 85년 여름 결혼을 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결혼할 때도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처가는 불교 집안이었고 우리 집은 뿌리 깊은 유교 집안이었다. 양쪽 집안에서 반대했기 때문에 결혼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결혼하기로 작정했기에 결혼을 강행했다. 양가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장인어른은 결혼식도 참석치 않으셨다. 이런 아픔도 겪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히 믿으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독일로 건너갔다. 그러다 보니 양쪽 집안으로부터 어떤 물질적인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85년 여름에 독일로 건너가서 약 6년간의 독일 신학공부가 시작됐다.

하나님이 우리를 독일로 부르신 이유는 완전히 연단을 위함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물론 공부는 잘 됐다. 그러나 물질과 인격의 연단,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는 신학공부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독일로 갈 때 가지고 간 돈은 1년 정도 지나자 완전히 다 바닥났다. 양가의 부모님이 그래도 결혼했다고 조금씩 도와주신 돈이 다 떨어진 것이다. 독일, 유럽에서는 미국과 달리 학생들이 노동허가(work permit)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겨우 방학 동안만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86년도 4월에 첫애, 지애를 낳았고 89년에는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들어오는 수입원이 전혀 없다 보니 아파트 월세와 그 외에 학교에 들어가는 돈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게 됐다.

1988년, 맥도날드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다른 친구들은 다 부모님의 도움이나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을 하는데 아무 도움도 못 받는 내 신세는 참 처량했다. 이럴 즈음에 맥도날드에서 시간당 3-4불 정도를 받고 일을 했다. 하루는 내가 토마토를 썰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토마토 한 개를 집어 먹는 모습을 독일인 여자 조장이 발견했다.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호통을 치고 야단을 치는지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 순간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연단을 주십니까?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다 핑 돌았다. 그리고 순간 화가 나서 그 여자 조장에게 한 마디 해주려고 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 아들아, 이것까지 참지 못하면 네가 어떻게 나를 위해서 일할 수 있겠느냐?” 사실 내게는 억하심정이 있었다. ‘주님, 나는 왜 이처럼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주님의 뜻을 따른다고 독일까지 왔는데, 공부도 못하고 생계를 위해서 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런 하찮은 여자에게까지 창피를 당하지 이게 뭡니까?’ 주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이것까지 참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이보다 더한 사람들도 만나서 그들을 나에게로 인도하여야 할 때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나는 한참을 울면서 “이것도 참겠습니다.”하고 교훈으로 삼고 넘어간 적이 있었다.


기계에 대고 설교하다


87년경의 여름에 8주 정도 일할 수 있는 노동허가를 받았다. 그때 공구와 자동차 부품 등으로 유명한 보쉬(Bosch)에서 일하게 됐다. 독일에서는 모든 일이 완전 자동화가 되어 있어서 사람이 일할 것이 별로 없다. 가만히 서서 자동화 공정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는지 보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정지 버튼만 누르면 된다. 8시간을 그러고 서 있자니 너무나도 따분하고 괴로워서 조그마한 독일 성경책을 사서 그것을 읽었다. 독일인 감독이 성경 보지 말고 일만 하라고 나무랐다. 기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또 원망조로 기도했다. “주님,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서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왜 나를 선교사로 부르시고도 아무 일도 못하게 하십니까? 내가 배고파도 좋으니 차라리 주님 일을 하다가 죽으면 더 가치 있지 않습니까? 10년 이상을 찾고 구해서 만난 주님이 왜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십니까?” 그 때 갑자기 내 마음 속에 ‘아, 이 시간을 유용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기계를 대상으로 부활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8시간을 계속 설교했다. 이렇게 8주를 보낸 적이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함께 유학 온 친구들은 다 공부할 때 나는 생활비가 없어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주변에 있는 모든 회사를 다 찾아갔다. 어떤 건축회사에 갔더니 페인트칠을 하라고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 그 회사로 일을 하러 갔더니,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내려서 보니 독일에 갓 온 어떤 전도사님의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의 바로 옆 동은 우리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한국 목사님들의 집이었다. 그분들은 전부 박사과정을 밟고 있거나 혹은 어학공부를 하셨다. 그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나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건축회사는 내게 그 집에서 벽을 긁어내고 벽지를 바르는 일을 시켰다. 얼마나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하든지... 어디 이뿐인가. 돈이 부족해서 아파트 주변에 있는 병들을 주워서 그것을 팔아 빵을 사들고 들어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고 아내는 장인이 큰 회사의 부산 지사장을 지낸 집안의 딸이었다. 우리 둘은 완전히 온실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아내는 학생시절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와서 유명 대학 교수에게 레슨을 받고 다닐 만큼 부유하게 자랐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했으니 이 연단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김광신 목사님(은혜한인교회, 미국 L.A.)이 알마티로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은행에 진 빚을 다 갚고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밤에 신문사에 가서 신문 접는 일도 해야 했다. 밤 10시에 가서 새벽 5시에 돌아오는데 그 당시 딸이 네살, 아들이 한살이었다. 매일 밤마다 아이들을 두고 가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지금도 형언할 길이 없다. 종종 일을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오면 딸이 베란다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애, 너 거기서 뭐하니?” 했더니 난처한 얼굴로 “엄마, 하경이가 깼어요.”하고 대답했다.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몇 시간을 잠을 못자고 동생을 껴안고 달래 주었다.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선교사로 연단시키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었다.

#선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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