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 김밥

이런 걸 두고 바로 ‘김밥 옆구리 터지는 얘기’라고 한다. 시댁에 들어온 후 처음 맞는 시아버지 생신날, 여염집 외며느리처럼 상다리 휘어지게 생신상을 차려드리고 싶었지만, 며칠 전에 치른 참기름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채 아물지 않은 터라 ‘가만히 있는 게 선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생신을 며칠 앞두고 우연히 시아버지와 ‘일식 초밥’ 책을 보다가, “전에는 자주 초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요즘은 기력이 딸려서 관두었다.”며 씁쓸해하시는 걸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한국식 김밥을 만들어드리겠다.”고 또, 먼저, 화인(禍因)을 제공하고야 말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당장 주방으로 들어가 일본쌀, 김발, 김, 생강절임 등 소지하고 계신 관련 식용품을 전부 꺼내놓고 어린애처럼 들떠하시는 시아버지를 보니, 이번에야말로 뭔가 제대로 될 것만 같은 묘한 흥분에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생신 전날, 유부초밥, 맛살, 참치, 소고기 김밥 네 가지로 메뉴를 정하고 시아버지와 중국 가게에 가서 질이 떨어지는 유부를 제외한 모든 재료를 사올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재료를 손질하는 내게 “밥을 내일 아침에 지어서 식힌 후 식초와 설탕으로 미리 간을 맞춰놓겠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이번에도 역시 조용히 넘어가긴 글렀다는 걸 알아차렸다.

김밥도 초밥처럼 식초와 설탕으로 간을 맞추는 것으로 생각하신 시아버지의 자상한 제의였지만, 순한국식 김밥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김밥은 밥이 더울 때 참기름과 소금, 깨소금으로 양념을 해야 제 맛’이니 직접 하겠노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또다시 강한 의혹을 제기하시며 거실로 사라진 시아버지는 평소처럼 증거자료 수집에 혈안이 되셨는데, 이번에는 별 소득이 없었는지 멋쩍은 얼굴로 돌아오셔서는 ‘밥은 당신이 짓고, 양념만 내가 하는’ 절충안을 제안하셨다. 이렇게 해서라도 김밥 말기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그 유별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분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파란 눈의 시아버지와 검은 눈의 며느리가 함께 만든 ‘한.프 합작 김밥’이 드디어 탄생했다. 시아버지가 밥을 좀 질게 하신 탓에 내 실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해 속이 조금 상했지만, 시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겁기만 했다.


이리하야, 우리의 김밥은 파란 눈의 시부모님을 감동시킨 최초의 한국 음식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며느리 #시아버지 #전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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