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 우둥퉁한 내 너구리


‘밤참으로 몰래 컵라면 끓여먹기’는 결국 1주일 만에 시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그런데 당신이 공급하는 지정 먹거리 외의 사식을 들여온 것에 불같이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처음 보는 컵라면이 신기하다며 먹어보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저녁에 다같이 둘러앉아 신라면 큰사발을 하나 끓여서 맛을 보는데, 어머니는 너무 맵다고 수저를 놓으시는 반면, 시아버지는 사레가 걸려 눈물콧물 섞인 기침을 하면서도 맛있다고 국물까지 다 드셔서 우리 부부를 놀라게 했다. 다음 날 시아버지의 재촉으로 중국 가게에 가서 온갖 종류의 한국 라면과 사발면을 사와, 매일 저녁마다 하나씩 끓여서 서양식 스프처럼 나눠먹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다.


라면 끓이기에 점점 재미가 붙으신 시아버지는 야채와 계란으로 겉봉투 사진과 똑같은 라면을 끓여내셨는데 용법대로 끓여선지 맛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지나친 실험정신이 발동된 어떤 날은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등 온갖 종류의 서양 야채를 넣어 정체불명의 야채전골을 만들기도 했다.


이 ‘불안한 행복’이 지속되던 어느 날, 외출했다 늦게 들어온 우리를 시아버지가 반갑게 맞으시며 “너희 주려고 수프 끓여놨다.” 하시는데, 불길한 예감에 얼핏 휴지통을 보니 그냥 라면도 아닌 너구리 봉투가 보였다. 너구리를 오래 끓일수록 구수한 맛이 나는 파스타 수프와 같은 거로 생각하신 시아버지께옵서 두 분이 식사하시던 두 시간 전부터 너구리를 미리 끓여놓으신 거였다.

해맑게 미소 지으며 냄비 뚜껑을 열어 자랑을 하시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동통한 너구리가 ‘우둥퉁한 너구리’가 되어 냄비 안을 하얗게 채우고 있는 게 보였다.


‘오, 주여….!’ 순간 정신이 아찔했지만, 그릇 가득 퍼주시며 우리가 맛있게 먹는 걸 보시려고 식탁에 마주 앉기까지 하시는 시아버지께 이번만은 도저히 진실을 밝힐 수가 없었다.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니 구역질이 바로 올라왔다. 바로 그 순간, 하늘이 도왔는지 전화벨이 울려 시아버지가 거실로 나가셨고, 나는 재빨리 육중한 너구리가닥을 개 밥그릇에 쏟아 부었다. 시아버지가 주방으로 돌아오셨을 때 나는 새초롬이 앉아 샐러드를 먹고 있었고, 엄한 개만 사람들 밥 먹는 데 알짱거린다고 욕을 먹으며 쫓겨났다. 억울한 표정으로 쫓겨나며 계속 날 돌아보는 개에게 속으로 한마디 건넸다.


‘알아, 알아. 그 대신 지난번에 김치 냄새 역겹다고 줄행랑친 거, 그거 용서해 줄게!’

#며느리 #시아버지 #전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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