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를 배우는 한국인 척추 전문의, 이유진 박사 가족 인터뷰

오늘은 한국계 러시아인이면서 이스라엘 시민권자인 척추 전문의 이유진 박사와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다. 유월절 마지막 날, 벤 예후다 거리에 있는 한국 문화원에서 이유진 박사와 그 가족들을 만났다. 그는 고려인으로 대학 시절 유대인 아내를 만나 현재 일남 일녀를 두고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지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필자와 이유진(Dr. Lee Evgeny)씨의 첫 만남은 다소 코믹했다.

“일본 사람인가요? 아님 중국 사람인가요? ” “아뇨! 한국 사람입니다! ” “근데 왜 한국어를 배워요? ”

고려인의 아픈 역사를 딛고 우뚝 서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채 억압과 수탈에 눈물 마를 날이 없던 그 때, 국권 강탈 직후부터 1914년 까지 6만 여명의 한국인이 연해주로 이주했다. 1923년에는 10만 7천 여명 정도가 이주했는데 그들 중 7만 2천명 가량이 소련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이 연해주 침략을 위해 한국인들을 첩자로 이용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빌미로 한국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어느 날, 1천여 명의 한국 지식인들의 총살과 함께 강제 이주는 시작되었다. 곡식 씨앗과 옷가지, 몇 권의 책만 달랑 든 채 18만 한인들은 1937년 9월부터 두 달간 화물 열차에 올라야 했다.

차창을 열자 매서운 겨울 바람이 달리는 기차 안으로 불어 들어왔다. 벌써 몇 구 째인지, 낡은 옷자락 하나 걸쳐진 채 고려인들의 시신은 철로 변으로 던져졌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로 이주하는 수많은 고려인들은 열악한 위생 상태와 배고픔에 못 이겨 기차 안에서 여럿 죽어 갔고, 이유진 박사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슈켄트로 이동한 고려인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했고, 곧 근면함과 명석한 두뇌로 인해 다른 소수 민족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결혼한 이 박사의 부모님 역시 엔지니어로 성공할 수 있었고 그들은 이 박사를 우크라이나에 있는 의과대로 유학 보낼 만큼 ‘유복한 고려인’ 가정을 이뤄내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큰 형님과 함께 살고 계세요. 참, 저는 서울에 계시는 이모님도 뵐 겸 올해 10월에 처음으로 한국에 가게 됐어요. ”

웃는 모습이 한국의 시골 옆집 아저씨 같이 푸근해 보이는 이 박사. 그는 어린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한국 방문에 한껏 들떠 있었다.

<이유진 박사 가족사진>

다음은 이유진 박사 가족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필자: 가족 소개와 이스라엘로 오시게 된 배경을 부탁합니다.

이 박사: 텔 아비브 메디칼 센터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근무 중인 아내와 현재 군복무중인 딸과 열살 난 아들 입니다. 저는 텔 아비브에 있는 ‘마카비 메디칼 센터’에서 척추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는 1994년 우크라이나 의대 재학 시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해서 큰딸이 두 살 되던 1997년에 ‘알리야’ 를 했습니다. 아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결혼하면서 저 역시 함께 알리야를 할 수 있었죠.

필자: 왜 우크라이나로 가셨는지요? 그리고 한국인이라서 유대인 아내와 결혼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는지요?

이 박사: 그 당시 우즈베키스탄 의대는 시설이나 교육 수준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주변에서 우크라이나 의대를 권했습니다. 결혼 반대는, 다행히 아내 가족이 종교인 가정이 아니었고, 우크라이나에 살던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계셔서 제가 덕을 많이 봤습니다. 또 제가 의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아내 공부를 많이 도와준 것도 큰 점수를 따는 요인이 됐지요.(웃음)

필자: 그곳에서 결혼 후에 알리야를 결정하시게 된 이유는요?

이박사: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연방 붕괴 후에 1991년에 독립 국가가 되었지만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로 의사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았고,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법률적 제한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승진과 여러 가지 부분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내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척 모두 알리야를 결정했고 저 역시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필자: 두분 다 이스라엘 내 유명 종합 병원에서 근무하시는데, 이스라엘 정착까지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이박사: 아내는 히브리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저는 환자 진료를 위해서는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필수로 해야 해서 뒤늦게 히브리어 공부하느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현재 이미 4개 국어를 하고 있지만, 10월에 한국 행을 앞두고 한국어를 배우느라 새로운 고생 길에 들어섰습니다(웃음). 우크라이나 의대를 나왔지만 이스라엘 의사 고시는 물론, 각종 테스트를 둘 다 우수한 성적으로 패스해서 의사 직을 얻기까지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필자: 올 10월 한국 방문에 대해 말씀을 부탁 드립니다.

이박사: 강남에 있는 척추 전문 병원, ‘우리들 병원’에서 실시하는 해외 전문의 협력 프로그램을 통해 올 10월부터 내년 4월까지 머물 예정입니다. 환자 진료는 물론 프로젝트 공동 연구, 재훈련 등을 통해 이스라엘과 한국 간 의료 협력 부문에 기여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가을 절기(로쉬 하샤나와 수콧)때와 겨울 방학 때 함께 와서 지낼 예정입니다. 저희 가족은 물론, 저도 생전 처음으로 밟게 되는 조상의 땅, 한국에 대한 기대로 많이 설레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계신 형님 가족과 어머니도 물론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필자: 아내분과 자녀들이 생각하는 한국이 궁금한데요.

아내: 사실 우크라이나에서는 남편을 ‘고려인’ 으로 만났기 때문에 크게 한국인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로 온 후에,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한류를 통해 한국에 대한 뉴스를 많이 접하며 남편을 ‘ 한국인 ’으로 보기 시작했지요(웃음). 남편은 거친 유대인 남자들과는 달리 자상하고 부드러워서 아이들도 잘 돌봐주고 아주 가정적이어서 주변에서도 많이 부러워합니다. 단, 부엌일은 잘 못해서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아요.^^

큰 딸: 군대에서 한국 드라마나 Kpop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통해 한국 얘기를 자주 듣고 있고, 한국 방문을 앞두고 한국 관련 책을 많이 읽고 있어요. 저는 다양한 국적을 골고루 소유한 우리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저 역시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라고 격려하셔서 제대하면 세계 여행을 할 생각이에요.

아들: 얼마 전에 아빠가 한글 선생님(필자)이 주셨다는 ‘초코파이’ 를 갖고 오셨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가을에 한국에 가면 맛있는 거 많이 사먹고 싶어요(웃음).

인터뷰를 마치며 딸이 중학교 때 과제로 만들었다는 ‘가족 앨범’을 함께 보았다. 고려인 ‘이 씨 가문’과 유대인 ‘ 야르친스키 가문 ’의 결합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 두 가문은 사실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다. 나라를 잃고 외국에서 서러운 삶을 전전하며 자녀들에게는 그 배고픔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허리띠를 졸라맨 조상들의 눈물겨운 삶을 오래된 사진 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뼈를 깎는 듯한 고난 가운데 맺은 아름다운 결실과도 같은, ‘약속의 땅, 이스라엘 ’로 알리야를 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랑스런 자녀”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헤어지기 전 오짜르 발행인이 한국 문화원을 직접 소개하시며 두 자녀에게 한국 기념품을 선물로 주셨다. “갖고 다니는 펜 종류가 많으니 더 큰 색동 필통은 없느냐?”며 다소 당찬 요구를 하는 아들을 보며 역시 한국인 보다는 유대인의 피가 더 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진 박사의 가족 인터뷰는 유대인과 한국인에게 흐르는 민족적 공통 분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유대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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